단종실록과 계유정난

단종실록 따르면 단종은 12살의 어린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성년이 되기 전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면 보통 궁중에서 서열이 높은 왕실의 어른이 수렴청정을 했습니다.

단종실록 어진
단종 어진

하지만 당시 대왕대비는 물론 대비도 없었고 심지어 왕비마저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단종은 어려서부터 세종의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명석하였지만 즉위 이후 너무 어린나이로 정사를 돌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업무를 왕을 대신해서 의정부와 육조가 도맡아 처리를 하였으며 인사는 황표정사라는 제도를 써서 왕은 단지 결재만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계유정난

이렇듯 왕권이 약화되고 신권의 권력이 커지면서 다른 왕족의 세력이 커져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도세종의 둘째인 수양대군과 셋째인 안평대군의 세력이 경쟁을 벌이며 왕위를 찬탈하는 계유정난이 발생하게 됩니다.

수양대군은 1453년 계유정난을 일키고 권력을 잡게 됩니다. 수양대군은 문종이 서거하자 어린왕을 보필한다면서 전면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김종서,황보인, 안평대군을 제거하고 조정은 수양대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됩니다.

수양대군은 정치적 실권을 완전히 장악한 후 왕의 측근을 모두 유배를 보내고 이에 위협을 느낀 어린 단종은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양위를 하고 수강궁을 들어가게 됩니다.

단종실록에 따르면 김종서와 황보인등 조정대신들이 안평대군 등 종친뿐만 아니라 혜빈 양씨 등이 모의하여 궁중까지 세력을 확대하고 황표정사를 이용해 자기 세력을 요직에 배치하는 등 수양대군에게 위협을 가한 것이 계유정난의 원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종실록 편찬시기가 세조 때 작성된 점을 고려해보면 이 기록은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종합해보면 수양대군이 왕권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의정부 대신들이 조정을 장악했다고 해도 이것은 왕권에 대한 욕심이라기보다는 왕이 권한을 펼칠 수 없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시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종때부터 이어져 온 재상중심제를 삼았던 정치이념으로 보더라도 왕의 나이와 상관없이 통치는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계유정난은 수양과 주변인물들이 왕권을 탐해 저지른 비윤리적인 역모라고 보는것이 통설입니다.

단종 복위운동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고 수양의 왕위 찬탈을 역모로 단정하고 단종 복위운동을 꾀합니다. 이 계획은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오겠다고 하면서 구체화가 되고 수양대군이 명나라의 책명사를 맞이하기 위해 상왕 단종과 함께 창덕궁으로 갈때 세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으나 무위로 끝나고 맙니다.

집현전 학사 출신의 단종 복위 계획이 실패한 이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여기서 다시한번 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이 역시 실패로 끝나게 되면서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사약을 받게 되면서 생을 마감합니다.

이렇듯 수양대군의 왕권계승은 왕위 찬탈로 인식되었으며 후대에도 단종을 위해 충절을 보였던 신하들을 높이 평가했음으로 알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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