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파 등장과 의미는 그동안의 공신 세력들에 의해 독점 되었던 권력이 견제와 균형을 이뤄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 되었다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사림파의 시초가 되는 인물은 김종직입니다. 고려 말 길재의 영항을 이어 받은 영남 성리학파 인물입니다.
사림파는 삼사를 중심으로 자신들이 성리학의 적통 계승자임을 자부하며 훈구파를 불의와 타협한 소인배로 멸시하고 배척하였습니다.
김종직의 문하로는 김일손 김광일, 남효은 등 당시의 뛰어난 문장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때문에 성종으로서는 이들을 모두 포용하기 위해서 김종직을 중용하면서 사림파는 훈구 세력에 필적할 만한 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종의 후원은 받은 사림파는 세조 말 폐지되었던 유향소를 부활시키면서 본격적으로 세력을 팽창시키기 시작합니다.
유향소는 지방의 자치기구 형태로 부패한 향리를 감시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하면서 학문의 연구 전파를 담당하였습니다.
유향소는 고려 말 형성되었으나 지방의 자치기구 역할 한다는 이유로 중앙 집권체제와 왕권 약화를 이유로 태종 대에 이르러 폐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세종 대에 이르러 지방 관리들의 부패를 감시하는 제한적인 역할로만 부활을 시켰다가 세조 대에 다시 중앙 집권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또다시 폐지가 되는 등 부침이 많았던 제도입니다.
사림파 대표 인물 김종직
조선 초기 나라의 기틀이 다져진 후 조선에서 가장 큰 변화의 바람은 정치의 변화 바람이었습니다. 정희왕후의 수렴 청정이 끝나고 성종이 본격적인 치세를 열면서 기존의 훈구 세력에 맞설 성종의 근위 세력이 필요했했고 자연스럽게 공신 세력인 훈구파에 맞설 세력으로 고려 말 정몽주와 길재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가는 김종직이 적임자로 떠올랐던 것입니다.
사림파 대표 인물 김종직은 대의명분을 중시하였는데 계유정난을 통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롯한 공신 세력을 멸시하며 훈구 세력을 자극하게 됩니다.
김종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세조가 단종을 폐위한 것에 반발하여 “조의제문”을 남기게 됩니다. 훗날 이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어 무오사회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조의제문과 비판적인 상소문은 김종직의 식견과 절의를 보여주는 것으로 왕이라고 할 지라고 도리를 지키지 않으면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적 기반이 성종의 철학과 맞닿으면서 도학적인 자세로 국정을 운영하는 토대가 되어 주었습니다.
김종직은 화려한 문장이나 시문보다는 정의를 숭상하고 의리적인 성향을 보였으며 제자들 역시 이런 스승의 사상을 따라 절의와 의리를 앞세우며 이를 저버린 훈구 세력의 비리와 부도덕을 비판하였습니다.
김종직은 1492년 6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으나 그로부터 6년 뒤인 1498년 연산군 대에 이르러 무오사화가 발생하며 부관참시를 당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