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실록 왕위계승과 주요 인물

성종 실록에 따르면 부왕이던 예종이 승하 하자마자 바로 정의왕후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 둘째아들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혔습니다.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의 등극이었습니다.

13세의 어린나이였던 자을산군이 이렇게 빠르게 왕위를 계승하게 된 데에는 정치적인 권력구도 때문이었습니다.

성종 왕위 계승 배경

성종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예종의 아들과 심지어 자을산군의 형인 월산군 또한 존재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의왕후는 세조의 유지였으며, 다른 왕자들의 건강과 나이를 이유삼아 자을산군을 왕으로 옹립하였습니다.

이같은 주장이 실행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정의왕후와 한명회의 권력 유지를 위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한명회는 당시 최고의 권력가였으며 동시에 자을산군의 장인이었으며, 정의왕후 역시 13세의 어린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 본인이 수렴청정을 통해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종이 13세의 어린나이로 즉위를 하게 되면서 자질이 뛰어나고 장성한 종친들은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들로 여겨졌으며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정희왕후와 대신들은 세조의 계유정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왕권 안정을 위한 정의왕후와 원로 대신들의 정치적 결단은 성공을 거두면서 한명회, 신숙주 등 공신세력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월산군, 제안대군 등 명망 있고 뛰어난 종친들은 희생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성종 주요 정치사상

성종은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고 7년간 정의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성년이 된 이후 본격적인 치세를 시작하였습니다. 조정 대신들의 권력 견제와 균형을 위해 기존 훈구세력에 맞설 사림 세력을 키워내며 유교사상에 입각한 왕도정치를 실천해 나갔습니다. 성종 (成宗)이라는 묘호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만들어갔습니다.

성종은 수렴청정이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원상제도를 폐지하면서 왕명 출납과 서무결재권을 복원시켰습니다. 또한 김종직으로 대표되는 사림출신 문신들을 중용하면서 권신들의 세력을 서로 견제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성종은 성리학에 따른 정치를 펼쳐갔으며 성균관 존경각에 경전을 소장하게 하고 학문연구를 후원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종시대에는 사서 편찬사업이 융성하였으며 그 결과물로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국조오례의, 악학궤범 등이 간행되었습니다.

학문을 연구하는 장소 성균관 사진

이렇게 성종은 태조 이후 다져온 조선왕조의 전반적인 키틀을 완성할 수 있었으며, 조선은 개국 이래 가장 평온한 태평성대를 맞이하였습니다.

성종 주요 가계 인물

소혜왕후 한씨

소혜왕후 한씨는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의 비로 1455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의경세자가 요절한 후 사가로 물러나게 됩니다.

1469년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즉위를 하게 되면서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고 소혜왕후 역시 인수대비로 책봉됩니다.

폐비 윤씨

폐비 윤씨는 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이며 연산군의 어머니입니다. 왕비로 책봉되던 해 세자(연산군)를 낳았지만 투기가 심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477년 독약을 숨겨두었다가 발각되어 왕과 후궁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 받았으나 성종의 선처로 위기를 넘겼으나 결국 성종이 자신이 멀리하고 규방을 자주 찾는다 하여 다툼끝에 왕의 얼굴에 상처를 내기에 이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인수대비와 성종의 분노를 유발하고 결국 폐비가 되어 사가로 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가 성장함에 따라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점심으로 폐비 윤씨 문제를 풀어보려 하였으나 결국 주변인들의 계략과 권력 투쟁 속에 폐비 윤씨는 사약을 받고 사사됩니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 후 백년동안 폐비 윤씨 문제를 거론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연산군이 즉위한 후 얼마되지 않아 폐비의 사건을 알게 되면서 폭정과 갑자사화를 일으키며 참극을 불러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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