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즉위 과정과 왕권 강화

세조 (수양대군)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둘째 아들로 친형인 장남 문종보다 3년 늦게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부터 학문적 자질이 뛰어 났으며 형인 문종과 달리 무예에도 능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세조 어진 초본
세조 어진 초본

세조 즉위 과정

수양대군은 어린시절에는 진양대군으로 봉해졌으나 세종 27년에 수양대군으로 봉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수양대군은 자신의 친형인 문종이 승하 하고 어린 조카인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을 보좌한다는 명분으로 조정의 일에 깊숙히 관여하면서 조정 대신들과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자신의 세력을 키워 결국 1453년 계유년에 난을 일으키면서 정권을 잡았으며 그의 나이 39세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세조는 왕으로 즉위한 뒤 단종을 상왕으로 앉혔으나,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로 구성된 사육신이 단종 복위사건을 계획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발각되어 결국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내지기 됩니다. 그 후 금성대군에 의해 다시 한번 단종 복위계획이 발각되고 결국 금성대군과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 역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렇듯 세조는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은 왕권강화를 위해 모두 제거하는 무단정치를 자행하고 기존의 권력구조 개편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합니다.

세조 왕권강화 정책

육조직계제 부활

세조는 우선 내각제 성격을 갖고 있던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다시 육조직계제를 부활시켰습니다.

또한 의정부서사제의 근본역할을 담당했던 집현전을 폐지하고 신하와 왕이 함께 토론하며 정책을 이야기 핟던 경연제를 중단시켰습니다.

세조가 집현전을 폐지시킨 건 성상문, 박팽년 등 단종 복위 계획을 이끌었던 집현전을 없애 조정의 학식있는 신료들이 후일을 도모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렇게 세종과 문종대에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위해 설치되었던 모든 기관이 폐지가 되면서 국가의 운영을 위한 정책과 왕의 독단을 규제하였던 대간의 기능이 매우 약해졌습니다.

대신 왕명을 출납하는 기관인 승정원의 기능이 대폭 강화됐으며 이런 위상을 바탕으로 승정원은 본연의 업무 외에도 국가의 중대 사무를 모두 관장하게 되었습니다.

세조는 모든 정사를 자신이 직접 처리하기를 바라면서 비서실 중심의 측근 위주의 정치를 펼쳤습니다. 그 결과로 원상제라는 대리서무제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원상제는 왕이 지명한 중신이 승정원에 상시로 나와 왕자와 함께 국정의 처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호패법 부활

태종재에 실시했던 호패법을 부활 시켜 백성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이는 역시 왕위를 찬탈함에 따라 이반된 민심을 관리, 감시하기 위함으로 보여집니다.

직전제 실시

원래 조정에서는 관리들에게 녹봉을 과전으로 지급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전현직 관리 모두에게 과전을 나눠주기에는 국가의 재정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이에 직전제를 실시하여 현직 관리에게만 과전을 지급하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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