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일기 두번의 사화를 거친 이후

역사의 기록은 후대에 의해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기록 자체도 승자의 입장에서 쓰여질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연산군 역시 중종 반정에 의해 쫓겨난 왕에 대한 기록을 했기 때문에 후세의 평가는 폭군의 이미지에 갇힌 한계를 가질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연산군 일기 재조명

그렇지만 최근 다시 한번 조선왕조실록의 연구를 통해 연산군 역시 다시 한번 재평가를 받는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연산군의 폭정만을 부각하기 보단 왕권 강화를 위한 자구책으로 보는 시각과 함께 인간적인 고통을 부각하며 동정론을 주장하는 역사학자들도 하나 둘 늘어가고 있습니다.

역사를 맹목적으로 실록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것에서 벗어나 연산군에 대한 평가를 나름 하는 것은 가치가 있는것으로 볼 수 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연산군의 폭정까지 동정론으로 포장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조선 사회의 체제와 삶의 방식을 고려한다면 연산군의 행동은 결국은 범죄행위 였기 때문입니다.

왕권강화라는 것은 왕 백성과 신하들 위에 단순히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백성들과 신하들의 구심점이 되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연산군의 권력독점

사화는 ‘사림의 화’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로 사림파가 정치적으로 우세해지는 선조 이후 부터 사화라는 표현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림세력의 정계 진출은 성종 시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이는 당시 정치 세력 간의 불균형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사림파들의 주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주로 언론을 담당하며 삼사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삼사의 역할을 보면 문무백관들에 대한 감찰과 탄핵, 국왕에 대한 간쟁과 정치 알반에 대한 언론 등을 담당하였던 곳 입니다.

왕과 신하들의 경연 장면 사진
경연 -출처:위키백과-

사림 세력은 주자학의 정통 계승자임을 스스로 자부하며 훈구 대신들과는 차별성을 두며 공신과 외척 세력들을 불의와 타협하고 권력을 잡은 세력으로 치부하며 서로 적대적 관계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사상적 정치적 대립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당시 사회 상황으로 본다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것으로 추측됩니다.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는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사림의 정계진출을 안팎으로 막았기 때문에 새로운 질서를 구현하려고 했던 과정에서 사림과 훈구의 대립은 필연적이었던 것입니다.

연산군 일기 편찬 과정

연산군 일기는 연산군 사망 직후 1506년 11월에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종 반정으로 인해 폐위된 왕의 기록을 편찬하는 것으로 실록 대신 일기청을 설치하여 편찬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연산군 대의 사초기록은 자주 검열을 받아 사실 그대로 사초를 작성하기가 어려웠으며, 사관이 경연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도 빈번하였습니다.

게다가 임명받은 사관 역시 연산군의 측근으로 기록의 신뢰성이 저하되기도 하였으며 사초 또한 제대로 제출되 않았는데 이는 무오사화 이후 제출된 사초로 후에 해를 입을까 하는 두려움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편찬 작업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3년만인 1509년 편찬이 마무리 되었으나 실록이 아닌 이유로 외사고에 봉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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