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융은 1467년 성종과 숙의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후 숙의 윤씨는 왕비에 책봉되고 융은 연산군으로 책봉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융의 나이 3살이 되던해 시기와 질투로 인해 어머니 중전 윤씨가 폐비가 되어 사가로 쫓겨나게 되고 그로부터 5년뒤인 1483년 8살의 나이로 세자로 책봉 되었고 1494년 연산군의 나이 19세가 되던해 조선의 제 10대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연산군 초기 재위 시절
연산군은 19살에 왕위에 올랐지만 곧 성년이 될 시기였으므로 조정에서 섭정을 논하지는 않았습니다.
연산군은 세상에 알려진 바와 달리 초기 재위시절에는 군주로서 폭정을 펼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종대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이어졌습니다.
또한 성종 대의 많은 인재가 배출된 덕분에 뛰어난 관료들과 함께 안정적으로 국정을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전국 팔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해서 관료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백성들의 민심을 살피는 등 성종 말기에 나타났던 부패와 사회적 불안감을 해소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더욱 더 뛰어난 인재를 모집하기 위해 별시문과를 실시하여 33명의 뛰어난 인재를 발굴하였으며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귀화한 여진인을 활용하여 변방지역의 안정을 이끌어내기도 하였습니다.
문화 정책에서도 사가독서제를 도입하여 학문의 질을 높이고 조정의 학문 연구 분위기를 다잡는 한편 국조보감을 편찬해 제왕수업에 귀감이 되는 사서 편찬 작업에도 공을 들였습니다.
무오사화
연산군 초기 재위시절이 조정의 갈등없이 무탈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종 대에 조정에 진출한 사림파들과의 신경전이 지속됐기 때문입니다.
사림파의 중심인물 이었던 김종직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던 유자광의 ‘조의제문’에 대한 상소가 발단이 되었으며 사림파를 견제할 구실을 찾고 있던 연산군에게 있어서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며 다수의 사림파 세력은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으며 일부 훈구파 대신들까지도 제거가 되는 등 연산군의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갑자사화
무오사화를 통해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군주로서의 역할을 내팽겨치고 매일같이 향연과 패륜적인 행동을 자행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궁중으로 들어온 기생을 흥청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에서 유래해 마음껏 놀고 떠든다라는 뜻의 흥청거리다 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결국 연산군의 이같은 폭정과 사치행각으로 국고는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연산군은 국고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대신들에게 재산을 몰수하려 했으며 이 과정에서 대신들과 갈등이 격화됩니다.
이때를 노려 정권을 장악하려 했던 임사홍은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의 사건을 밀고하고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사 과정에 관여되었던 조정 관리는 물론 환관과 궁녀들까지 모조리 참하는 대 살생극을 벌이게 됩니다.
갑자사화는 연산군 모친인 폐비 윤씨에 대한 복수극으로 비쳐졌지만 실상은 정권장악을 시도했던 임사홍과 왕권에 도전하던 관료들을 제거하려는 연산군에 의해 벌어진 참살극에 불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