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 (해양대군)은 세조와 정의왕후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해양대군으로 봉해졌습니다. 그러다가 1457년 세조의 장남이었던 의경세자가 갑자기 사망한 후 8살에 세자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1468년 19살의 나이로 왕위에 등극하였습니다.
예종 수렴청정과 원상제도
예종이 즉위를 하였지만 나이와 건강문제로 실질적인 왕을 역할을 할 수 가 없었던 관계로 조선시대 최초로 수렴청정과 원상제를 바탕으로 국사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수렴청정은 모후인 정의왕후의 섭정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어머니 정의왕후의 대담한 성격과 과감한 결단력이 예종의 유약했던 성격을 잘 뒷받침해주었기에 조정은 큰 혼란없이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왕의 미숙한 결재능력을 보완하기 위한 원상제도를 마련하여 국사를 지원하였습니다. 원상제란 선왕이었던 세조가 마련한 것으로 신하들에 의한 섭정제도와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왕이 지명한 원로 중신이 승정원에서 국정을 상의해 의결하고 왕은 형식적인 결재만을 하는 제도였습니다.
결국 두 제도 모두 섭정형태의 국정 운영 방식이었기에 조정은 안정되었지만 왕권은 크게 약화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종은 1년2개월간의 짧은 재위기간에 어머니인 정의왕후의 수렴청정과 원상제도를 통한 대리서무 결재로 인해 실질적인 왕권을 행사하지 못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예종 최대 옥사 남이의 역모
재위기간이 1년2개월 밖에 안되는 예종 시대였지만 이때도 역시 권력 기반 쟁탈전을 위한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정난공신 세력들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등장한 새로운 세력을 숙청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남이는 세조 시절에 발생한 이시애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공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까지 역임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세조가 승하한 이후 한명회, 신숙주 등의 정난공신 세력들과 권력들을 차지하기 위한 견제가 시작되고 서로에 대한 비난과 비판을 이어갑니다.
결국 예종대에 이르러 남이는 병조판서에서 해임되었으며 이것을 시작으로 유자광의 모함과 함께 남이가 역모를 일으키려 하였다면서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역사에서는 남이의 기질로 보았을 때 역모 사건이 완전히 날조 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인식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세조의 총애를 받고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갑자기 예종이 즉위하고 바로 권력에서 밀려나 분노가 가득했을 것이며 당시 정치 상황으로 봐서는 충분히 개연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남이를 역모로 몰아간 유자광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조선 중기 엄청난 숙청사건이었던 무오사화, 갑자사화가 모두 유자광에게 책임이 있다는 시각이 많아지면서 남이의 역모 역시 유자광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설이 퍼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조선 후기 순조대에 이르러 신원이 회복되기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