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8년 6월 태종의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이 폐위된 양녕대군을 대신하여 세자에 책봉되고 바로 두 달 뒤 태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의 4대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조선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와 찬란한 민족 문화 발전을 꽃피워 냈습니다.
유교정치의 태동
세종대에는 태종이 이룩해놓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커다란 발전을 이뤄낸 시기입니다.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고 다양하고 수준높은 편찬사업이 이루어져 문화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태종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집권 초를 지나 1422년 태종이 죽은 다음부터 세종의 정치력이 돋보이기 시작합니다. 개국공신 세력이 모두 사라지고 과거를 통한 인재발굴로 유학자와 유학적 소양을 지난 국왕이 서로 만나 진정한 왕도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세종은 우선 왕권강화를 상징하였던 육조직계제를 의정부서사제로 변경하게됩니다. 그리고 세자로 하여금 일반적인 업무를 재결할 수 있는 권한을 나눠주었으며 언론에 대한 탄압이나 징계를 엄격히 제한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는 신권과 왕권이 조화된 유교적 왕도정치를 이끌어냈습니다.
세종대에 개편된 집현전은 단순한 학문적 사업만을 위한 기관이 아니라 인재의 양성과 새로운 문화의 정착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집현전은 젊고 유망한 학자들이 지속적으로 채용되었고 이들에게는 여러가지 특혜가 주어졌습니다.
집현전 인재들은 주로 책 편찬 사업과 훈민정음 연구 사업에 투입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업을 바탕으로 농사직설을 비롯한 실용서적과 역사, 법률,지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매우 뛰어난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학문적 성과는 과학기술 분야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천문한을 연구하는 서운관을 설치하고 최초의 천체 관측기계인 ‘혼천의’를 만들고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 세계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까지 백성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여러 과학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세종은 학문적 사업과 더불어 국토의 개척과 확장을 통해 국력을 신장시키는 일 또한 강력하게 추진을 하여두만강과 압록강에 4군6진을 개척하여 조선의 영토로 편입시키는 엄청난 성과를 이뤄 냈습니다.
이처럼 빛나는 유산과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유교와 유교정치에 대한 깊은 소양, 다양하고 깊은 학문적 성취와 탐구, 역사와 문화에 대한 통찰과 판단력, 중국 문화에 대한 경도되지 않는 주체성과 독창성, 백성과 신하에 대한 인간애 등으로 간직했던 세종의 뛰어난 인성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습니다.
과학의 발전
세종시대에는 여러 과학기술의 발전이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천문학의 발전의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천체관측기 혼천의
장영실을 중심으로 고서연구를 진행해 우리만의 천체관측기계인 혼천의를 발명하였습니다. 이 혼천의는 시계장치와 연결되어 천문시계의 기능을 하고 있었으며, 천문학의 발전은 시계의 발명을 가지고 왔습니다.
해시계와 물시계
당시의 시계는 해시계와 물시계로 대표할 수 있으며 장영실이 개발한 앙부일구는 단순히 시간만을 알게 해주는 기능만 있는 보통의 해시계와 달리 바늘의 그림자 끝을 따라가면 시간과 절기를 동시에 알게 해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해시계는 시계문화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지고 왔지만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이용할 수 없는 기능적인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시계가 물시계였습니다.
물시계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격루 입니다. 자격루는 시, 경, 점에 따라서 자동으로 종,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알려주는 일종의 자명종이었습니다.
해시계, 물시계와 더불어 천문학 발전으로 이루어진 것이 강수량을 측정할 수 있는 측우기입니다. 세종대에 만들어진 측우기는 세계최초의 기상 관측장비로 서양에서 개발된 것보다 2백년 이상 앞서 있는 기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