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의 난’으로 방석과 방번 형제가 죽임을 당하고 태조는 1398년 9월 둘째 아들인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방과는 동생인 이방원의 뜻에 따라 조선의 제2대 왕인 정종으로 등극을 하게 됩니다.
애초에 영앙군 방과는 왕위에 욕심이 없었습니다. 처음 세자 책봉 때부터 조선 개국의 1등 공신인 동생 이방원을 지속적으로 이야기 하며 세자 책봉을 극구 사양을 했지만 동생 이방원의 권유와 양보로 세자 책봉 및 왕위까지 오르게 된 것입니다.
사실 태조 이성계가 양위를 하게 된 것은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면이 있습니다. 이미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조정은 이방원의 세력이 장악을 했고 하필 이때 태조가 와병 중으로 도저히 대처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1차 왕자의 난
태조는 둘째부인인 강씨를 총애했습니다. 강씨의 집안은 권문세가로써 태조 이성계에게 많은 힘이 되주었으며 역성혁명 당시 강씨부인 역시 직접 참여해 막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게다가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 출신의 개국공신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결국 태조는 첫째 부인인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제치고 11살에 불과했던 강씨 소생인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기에 이르릅니다. 한씨 소생의 아들들, 특히 정안군 이방원이 가장 분개했지만 이미 왕명으로 결정된 세자 책봉을 되돌리기엔 불가능하였습니다.
당시 11살 이던 방석이 세자에 했을 때, 태조의 장남 방우의 나이 39세 였으며, 방원의 나이는 26세였습니다. 방원은 맏형이던 방우를 세자에 책봉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을 했지만 태조는 단호하게 거부하였습니다.
새로운 나라가 개국을 하면 항상 그렇듯이 개국 공신들의 지위는 급격히 상승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조선은 개국이후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권력구조화 심화되었습니다.
정도전은 개국 과정에서 이성계보다도 본인 더욱 개국의 주역임을 내세우며 신권중심의 왕정이라는 왕족들에게는 대단히 위협적인 내용으로 권력구도를 바꾸려고 했습니다.
결국 왕권강화와 신권강화의 대척점에서 병권집중화를 통해 권력을 통제하려고 했던 정도전의 계획에 이방원이 먼저 사병을 동원을 정도전과 그 일파를 습격해 제거하고 세자 방석까지 제거하면서 권력을 틀어쥐게 되었습니다.
정종 재위기간

정종 재위 기간은 2년 2개월로 매우 짧았습니다. 하지만 1399년 조선 개국과 함께 단행하였던 한양 천도를 되돌려 다시 개경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1399년 3월에는 집현전을 설치하여 장서와 경적의 강론을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태조 때 완성되었던 ‘향약제생집성방’을 편찬하였고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노비의 변속을 관리하는데 기틀을 다지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종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정무에 힘쓰기 보다는 오락에 매진을 하였고 덕분에 방원과의 우애를 유지하며 1400년 11월 마침내 소원하던 방원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렇게 죽은 후 오랫동안 묘호도 없이 공정대왕으로 불리다가 비로소 조선 중기에 다다라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