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실록 개혁실패와 혼란

중종 왕위 등극 전 이름은 역이며, 자는 낙천으로 1488년 성종과 계비였던 정현왕후 윤씨에서 태어났습니다.

1494년 진성대군으로 봉해졌으며 1506년 연산군을 폐위하고 조선 제 11대 왕으로 등극하였습니다.

중종 즉위 초기

중종 즉위 초기에는연산군의 폭정으로 무너진 나라의 기강을 다잡고 정치를 안정화 시키는 게 급선무였습니다. 따라서 중종은 왕의 자문을 담당하는 홍문관의 기능을 다시 강화하는 한편 경연을 중시하는 논쟁의 강도를 높이고 문신의 월과, 춘추과시 등을 강력하게 시행하여 문벌세족을 견제하였습니다.

왕도정치를 앞세워 공신세력의 팽창을 견제하려는 의도 속에 시행되었던 여러 정책은 초기에는 실효를 거두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중종을 왕위에 옹립시켰던 공신세력의 힘이 너무 강하였기에 왕의 입지가 약할 수 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조정 관료와 대신들 대부분이 되찾은 권력의 기득권을 누리려는 훈신 세력이었기에 왕도정치 추구는 항상 대립과 반목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는 중종 즉위 4년 뒤 공신세력의 핵심인물이었던 박원종이 죽고 난 뒤 세력이 약해지면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개혁 민심과 함께 반전이 이루어 졌습니다.

새로운 인물 조광조 등장

중종 시대는 조광조라는 인물의 등장 전후로 구분될 만큼 조광조라는 인물의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중종 시대 조광조 사진
조광조

무오사화로 유배 중이던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배우며 사상을 확립하였으며, 1510년 성균관에 입학한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개혁파의 리더로 성장을 하였습니다.

중종은 당시 공신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조광조를 정치 일선으로 이끌었습니다. 김굉필의 영향으로 매우 엄격한 도학 사상가로 성장한 조광조는 중종에게 도학사상을 바탕으로 한 군주정치로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척신 세력을 견제하게 하였습니다.

조광조의 영향에 따라 중종은 민간에까지 유교적 도덕관을 전파하기 위해 여씨향악을 실시 하였습니다. 여씨향약은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민간 자치 규율입니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은 당시 너무나 급진적이고 과격한 것으로 훈구세력의 매우 큰 반방을 불러왔으며 중종마저도 조광조의 개혁적 경향에 압박과 부담을 느끼기 사작합니다.

결국 중종과 훈구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반정공신 위훈 삭제 사건으로 조광조 일파는 기묘사화를 통해 숙청당하고 맙니다.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만들고 권력을 독점하려 임금을 속이고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는 상소가 빗발치면서 이를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모양새를 만들며 조광조, 김정 등 신진 사림세력이 몰락하게 됩니다.

이렇게 조광조 일파의 숙청은 중종 개혁정치의 실패와 종말을 뜻하게 되며 중종 중기 이후 정국은 급속도록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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