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실록에 따르면 1388년 이성계는 명나라의 요동을 공격하라는 왕명을 받들고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화도에 진을 치고 요동 정벌 작전을 시행하기 직전 말머리를 돌려 개경을 공격하였습니다.
개경을 함락시킨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우왕을 폐위시키고 최영을 제거함으로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고려가 명나라의 요동을 공격하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명나라가 원나라를 몰아낸 이후 고려의 철령 이북의 땅을 가져가겠다고 위협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고려는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고 좌군도통사에 조민수,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임명하고 요동 정벌을 추진했던 것입니다.
위화도 회군
하지만 이성계와 조민수가 요동정벌을 위해 5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위화도에 도착한 것은 5월이었습니다.
곧 장마가 시작어 압록강의 물이 불어나 강을 건널 수 없게 되고 알 수 없는 전염병까지 창궐하며 도저히 군사작전을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이성계는 우왕에게 요동정벌의 불가함을 알리는 ‘사불가론’ 에 대한 상소를 올리게 됩니다.
사불가론
- 작은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 우리의 전쟁 틈을 타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수 있으며
- 무덥고 습한 날씨 탓에 전염병의 염려가 있다
결국 우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성계와 조민수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새로운 나라라 ‘조선’을 개국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

1392년 7월 이성계는 마침내 고려의 국왕으로 등극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즉위 초기에는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의장과 법제도 역시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하지만 새왕조의 기틀이 갖추어지고 명의 양해를 얻어 1393년 국호를 ‘조선’으로 변경하였습니다.
조선으로 국호를 정하게 된 배경
이성계는 나라를 건국한 이후 여러가지 제반 조처들을 강구하였는데 그 중에서 가장 시급한 현안이 나라의 이름 즉 국호를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조정에서 논의를 거쳐 ‘화령’과 ‘조선’ 두 이름을 가지고 명에서 선택한 것은 바로 ‘조선’이었습니다.
조선은 단군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미였지만 명나라에서 기자조선을 의식하고 명나라의 제후국임을 의미로 생각하는 등 동상이몽이었던 것입니다.
한양 천도
고려의 도읍지 ‘개경’은 땅의 기운이 다하였고 새로운 나라의 민심을 다잡기 위해서라도 천도를 해야 하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조정에서는 정도전과 무학대사로 하여금 도읍지로서 한양을 살펴보게 했으며 마침내 왕도로 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궁궐터를 확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정도전과 무학대사 그리고 하륜이 내세운 주장이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륜은 모악산(지금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일대)아래를 궁궐터로 주장했지만 지역이 작고 형세가 마땅치 않아 논의에서 제외가 되었으며,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주장이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진산으로 하고 북악산과 남산을 좌우로 삼아야 한다고 했지만 정도전은 북악산 아래를 주장했습니다.
문제는 화산인 관악산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것에 궁궐을 짓게 되면 관악산의 화기가 끊임없는 우환을 가져올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정도전은 한강이 그 화기를 막아낼 것이라고 하며 서로의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결국 정도전의 주장이 채택되어 북악산 아래 남쪽을 바라보게 궁궐을 짓게 되었으며, 관악산의 화기를 막는다며 해태상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정도전
역성혁명론자였던 정도전은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 역성혁명을 통해 왕조를 교체 할 수 있다는 맹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국운이 기울어 가던 고려왕조를 폐하고 성리학을 바탕으로한 새로운 왕조를 꿈꾸었습니다.
당시 능력은 있었으나 출신과 신분이 보잘것 없어 외톨이 생활을 했던 것이 역성혁명을 꿈꿀 수 밖에 없었던 이유로 작용을 했다고 추측됩니다.
정도전에게 있어 조선의 개국은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성리학에 바탕을 둔 유교적 왕도정치의 실습장이었습니다.
정도전은 우선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새로운 법제도의 기반을 닦았으며, ‘경제문감’을 저술하여 각 벼슬의 직책을 확립하였습니다. 또한 명나라의 지속적인 공물요구에 반발하여 다시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사병혁파 등 병권집중을 위한 작업을 펼쳐나갑니다.
하지만 결국 사병혁파는 왕권과 자신의 세력에 위협을 느낀 태조 이성계 다섯번째 아들인 정안군 이방원에 의해 중도에서 좌절되고 맙니다.
정도전의 세력이 날로 강성해지자 결국 이방원과 다른 왕자들이 힘을 합쳐 정도전을 제거하였던 것입니다.
나라의 근본이 되는 법체계를 확립하고 유교이념 사상을 사회 속에 확립시키며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정치 내세웠던 정도전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선구안을 발휘하며 초기 조선 개국을 이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