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은 자신의 세력기반인 사병혁파에 반발하여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세자 방석을 제거한 뒤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형제들과의 관계를 고려해 세자 추대를 고사하고 자신의 형인 방과에게 왕위를 양보하였습니다. 하지만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을 거치고 나서 세자로 책봉되었고 이후 조선의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2차 왕자의 난
1400년 1월 넷째 방간이 박포와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킵니다. 왕위 계승과 권력다툼 속에서 발생한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조선의 실질적인 권력은 이방원이 잡게 됩니다.
하지만 방원의 바로 윗형인 방간은 왕위 계승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런 와중에 박포의 거짓 선동에 이끌려 사병을 동원해 난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방간 세력은 방원을 당해낼 수 없었고 도성 한복판에서 시가전을 벌이지만 결국 이방원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됩니다.
제2차 왕자의 난으로 방원에 대한 반대세력은 거의 소멸 되었고 방원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세자로 책봉된 방원은 그동안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병권을 장악하고 동시에 중앙집권을 위한 기틀을 다져갔습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마침내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등극을 하게 됩니다.
태종의 개혁업적
교육과 과거제도
태종은 특히 교육과 과거제도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고려말에서 조선초기로 이어지는 혼란한 시기에 유학자들은 대부분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거나 정치적 정적으로 제거되었습니다.
조선의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교육의 부흥이 필요했던 이방원은 권근을 책임자로 하여 유학과 경학에 밝은 자를 엄선해 성균관과 오부의 학생을 교육시켰습니다.
또한 기술교육을 위해 10학을 설치하고 제조를 두었습니다.
특히 과거제도에서 공거, 좌주문생제 등 귀족 위주의 관리 등용제도를 혁파하고 능력과 실력위주로 관리를 등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데 집중하였습니다.
종교정책
고려의 부패한 불교문화인 팔관회 연등제를 폐지하는 숭유억불 정책의 이념에 따라 불교와 도참사상을 규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개혁의 일환으로 먼저 사찰에 예속된 노비를 공노비로 전환시켰으며 연등제, 초파일제를 폐지하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교를 장려하기 위해 문묘제도를 정비하고 단군과 기자 등을 중사로 승격시켜 개인적인 자연신앙을 국가 신앙으로 이끌면서 유교문화 속으로 민족신앙을 예속시키려 하였습니다.
대외정책
명나라에 대해서는 상국의 예를 갖춰 조공을 하는 대신 서적, 약재, 역서 등을 수입하여 실리를 취하고 국경을 안정시켰습니다.
또한 부산포와 내이포에서 왜인의 무역을 합법화 하는 대신 왜인들의 범죄 행위를 다스리고 관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태종실록 주요사건
조사의의 난
태조 이성계 복위를 명분으로 한 거사였으며 주모자는 조사의, 강현 등이었고 배후에는 태조 이성계가 있었습니다. 함흥과 함께 동북면의 요지였던 안변을 책임지는 안변부사 였던 조사의는 이성계의 터전이기도 했던 동북면에서 고향 인물들을 부추겨 이성계의 복위를 추진했던 것입니다.
1402년 11월 도성에서 함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데 이때를 같이하여 조사의가 군대를 일으켰지만 이내 진압이 되며 거사는 실패하게 됩니다.
비록 거사는 실패로 끝이 났지만 막후에서 이 거사를 진두지휘한 인물이 다름아닌 아버지 태조 이성계였다는 사실이 이방원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육조직계제 실시
이방원은 세자 시절부터 왕권강화를 위해 다양한 정책을 구상했습니다. 그 중 의정부의 기능을 조정하면서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 육조를 관장하는 벼슬의 품계를 올리며 기능을 강화하는 한편 의정부 기능은 축소시켜 왕권과 중앙 집권을 크게 강화하였습니다.
거북선과 신문고
거북선은 태종실록부터 문헌 자료에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거북선은 왜구 격퇴를 위해 돌격선으로 특수 제작이 되었습니다. 이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고려말에서 조선초기에 개발되어 대마도 정벌을 위한 토벌작전에 사용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이방원은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유롭게 이를 신고할 수 있도록 신문고를 설치 운영하는 제도를 시행했습니다.
한양 재천도
조선 초기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하였으나 제1차 왕자의 난과 한양의 시설등이 미비해 정종 때 다시 개경으로 수도를 옮겼으나 제2차 왕자의 난과 태종의 등극 이후 다시 한양으로 천도를 하였고 이후 500년간 조선왕조의 정치 문화 중심지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