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실록 제도개혁

태종은 개국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난 이후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제도개혁을 실시하게 됩니다.

불교 제도개혁

조선 개국 세력인 신진사대부는 우주의 근본 원리와 인간의 심성문제를 다루는 성리학을 근본 사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성리학의 토대가 된 공자의 학문이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으므로 성리학 역시 현실을 중요시 하는 건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성리학의 발달은 종교적이고 비현실성이 강한 불교와 대척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신진사대부들은 고려 말 부패의 원인이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사회 곳곳에 스며 들어 있던 불교의 색채를 걷어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사찰 소유의 땅을 몰수하고 출가한 양반은 환속시키고 사찰과 승려의 수를 엄격히 규제하였습니다.

정도전에 의해 조선초기 불교탄압 정책을 시행하였으나 태조 이성계가 불교 신봉자 였기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400년 11월 태종이 즉위하면서 곧 환관들의 불심을 위해 마련되었던 궁중의 인왕상을 궁궐 밖으로 옮기고 불교의 행사를 폐지하였습니다.

또한 사간원의 건의를 받아들여 부녀자들이 절에 가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전국의 모든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혁파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불교는 존폐의 위기에 몰리면서 승려 수백 명이 궁궐 팡에 마련된 신문고를 이용해 불교에 대한 탄압을 중지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태종의 불교계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불교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높여 사찰과 승려 노비, 전답의 수량을 확정하고 종단마저 축소시켜버렸습니다.

이렇게 태종 대에 강력하게 실시된 억불정책은 세종 대 이후 더욱 심해져 불교 교단을 선종과 교종의 양종으로 정리하였으며 사찰도 36본산으로 한정시켜 버렸습니다.

화폐 제도개혁

조선 초기에는 주로 쌀이나 무명 등 물품화폐 위주의 유통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태종은 이런 물품화폐로는 활발한 경제활동이 어렵고 물품화폐의 성행은 중앙집권적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재정 조달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화폐 개혁에 사용되는 동전사진

그리하여 명목화폐제도를 도입하고자 하였으며 태종 원년인 1401년 처음으로 사섬서라는 화폐를 관장할 관청을 설치하고 명목화폐를 도입하였습니다.

처음 도입된 명목화폐인 저화의 가는 쌀2말이나 포 1필정도 였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저화사용을 기피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저화의 가치를 믿을 수 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여전히 물품화폐를 사용하였습니다.

결국 조정은 명목화폐 사용기간이 채 2년이 못되어 저화 인쇄를 중단하고 다시 물품화폐 유통체제로 환원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태종의 화폐제도에 대한 개혁의지는 꺽이지 않았습니다. 1410년 의정부에서 저화제도를 다시금 실시하기를 건의하였으며 태종은 사섬서를 부활시키고 다시 저화를 발행시켰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저화의 통용을 꺼렸고 그 때문에 상거래를 기피하는 현상이 생겨 유통업계가 침체되는 결과가 발생하였습니다. 결국 조정에서는 저화를 통용시키기 위해 금지하였던 포화 사용을 허용하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정에서는 동전을 만들어 유통시킬 것을 검토하였고 호조에서 이 방안을 받아들여 조선통보를 만들어 사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사간원에서 동전의 유통이 저화의 유통을 방해한다는 주장에 따라 동전화폐 사용자체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태종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추진되었던 화폐개혁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지만 이 실패를 바탕으로 세종대에 이르러 동전을 법화로 유통시킬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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