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창제와 반포

훈민정음은 세종의 수많은 업적의 결정체입니다. 하지만 훈민정음은 철저히 비밀리에 작업을 진행해야 했으며 언제부터 연구를 시작하여 누가 만들었는지 참여했는지는 불분명하다것이 학계의 현실입니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 사진
세종 어진

훈민정음 창제 배경

하지만 세종이 이런 엄청난 업적을 왜 혼자서 할 수 밖에 없었는지는 훈민정음 공표에 반대했던 최만리 상소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중국의 문자인 한자 대신 새로운 훈민정음을 쓰면 스스로 오랑캐가 된다는 논리와 설총의 이두로 충분히 백성들이 문자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당시 기득권자들의 뿌리깊은 ‘사대’와 ‘권위’였습니다.

당시의 유학자는 성리학을 삶의 지표로 삼고 동시에 중국을 섬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이 두 가지 원칙이자 철칙으로 삼고 권력을 지키는 수단으로 이용했습니다.

문자는 지배층만이 가질 수 있으며 학문은 본인들만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평민은 그저 이두 정도나 알면 됐으며 천민은 그마저도 모르는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양반은 바로 문자와 학문을 권력의 기반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종은 이런 현실을 알고 있었으며 공식적인 회의를 거쳐 문자를 창제한다면 시작도 못해보고 엄청난 반대에 부딪힐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세종이 쉬운 문자를 만들고자 했던 이유는 창제 동기에서 알 수 있듯이 백성들이 편한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작업시기

훈민정음 창제 작업시기는 대략 1436년 쯤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가 세종의 나이 이제 40세에 불과했지만 육조직계제 대신 의정부사서제를 통해 업무량을 크게 줄였으며 특히 세자에게 임금의 가장 중요한 업무인 서무결재권을 넘겨주었다는 부분입니다.

즉 세종은 새로운 문자 창체를 위해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부을 준비작업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작업은 6년여간 비밀리에 진행이 됐으며 아무도 세종이 무슨일을 계획하고 있는 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훈민정음이 완성되었을 때 기습적으로 공표를 단행하였습니다.

훈민정음 반포

훈민정음 반포에 대해 당시 집현전 학자들과 조정 대신들의 반발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반발과정에서 왕의 학문까지 깍아내릴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뜻을 굽히지 않았고 훈민정음의 창제원리와 사용방법을 설명하는 해설서를 편찬하고 세자와 아들들을 동원하여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등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지시하였습니다.

또한 훈민정음을 쉽게 접하고 익힐 수 있도록 관리들에게 의무적으로 훈민정음을 익히도록 하고 궁중의 여인들도 모두 익히도록 하였으며 조정의 대신과 기관에 훈민정음을 사용한 글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덕분에 순식간에 나라의 전 백성이 문자의 혜택을 누리는 세계 언어학사에 혁명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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